역할에 충실한 삶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책가방을 든 채 전화를 받으니 상냥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는 의예과 학생과장을 맡고 있는 ***입니다. 다름이 아니고 경제학과에서 교양으로 개설하는 시사생활경제에 대해 지난 학기 학생들의 반응이 아주 좋습니다. 특히 강의를 담당하신 ***교수님에 대해 학생들의 평가가 너무 좋아서 이번 학기에도 그 교수님을 의예과 강의에 배정해 줄 수 없으신지 해서요.” 일종의 청탁 전화다. 그런데, 우리 학부에는 *** 교수님이 계시지 않는다. 필시 강사 분이신 모양이다. 강사 분 섭외는 부학장님이 하시니 그쪽으로 연락을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물론 경제학과 과목을 좋아해 주시니 고맙다는 말도 빼놓지 않고.
불현 듯 최근 일들이 스친다. 학생을 성추행하다 사직을 당한 고대의 전임교수, 학생들을 종 부리듯 하며 폭행을 일삼다 사직을 당한 서울대 음대교수, 학생들을 프로젝트에 부리면서 인건비를 가로챈 서울공대 교수...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다. 최근 보수신문들이 반값등록금 이슈와 관련하여 대학교의 교수 및 직원들을 걸고 넘어지는 데 대해 떳떳하게 반박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런 문제점 때문이다. 소위 명문대의 교수들이 정말 치한과도 다름없는 일들을 너무나 버젓이 저지르고 있으며, 그러고도 반성의 기미는 전혀 없다는 것은 같은 길을 가는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어떻게 사는 삶이 제대로 사는 삶일까? 죽을 때까지 답할 수 없을 것 같은 질문이지만, 어쨌든 자신이 맡은 역할에 충실하며 사는 것이 그 어떻게의 하나가 아닐까? 물론 태어나서 자기가 원하는 역할을 부여받고 산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다행스럽거나 축복받은 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을 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할 기회를 부여받은 소위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 감사하며 소명을 다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소명은 커녕 사회지도층의 탈을 쓴 채, 파렴치한 행위를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치 자신의 노력에 대한 당연한 댓가인 것처럼.
교직을 맡고 있는 사람으로서 오늘 전화는 나에게 간명한 깨달음을 전해 준다. 우리 사회에서 강사의 지위가 얼마나 비참한가는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열정적인 강의로 다시 학생의 부름을 받은 그 강사는 자기의 소명에 충실한 삶이 무엇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2011년 6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