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은행의 역할
※ kdb산업은행의 사보인 「kdb소식」지 2014년 12월호에 실린 글이다. 편집되기 전의 글로서 실제 실린 글과는 아주 미세하지만
차이가 있다.
통합 산은은 국민에게 충직한 은행이다 (박정희:영남대학교 부교수)
통합산은은 2009년 분리 이전의 산업은행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2007년 말까지 산업은행에 재직했던 한 사람으로서 그 시기의 고민을 잘 알기에, 새롭게 출범하는 통합산은에 의례적인 축하를 건네기 조차 머뭇거려진다. 꽤 오랫동안의 고민이었던 산업은행의 정체성 문제에 지난 정부는 민영화로 대응하였지만 주변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그 와중에 산업은행은 정책금융공사로 이관된 업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소매금융 확충에 노력을 집중하다 손실을 입기도 하였다. 정책금융공사 역시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산업은행의 업무와 차별성이 없어 보인다는 비난을 감수하여야 했다. 이렇게 머뭇거리는 동안 새 정부는 다시 통합산은을 발족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상황이 단시일에 호전될 것 같지 않다는 판단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덜컥 이전 상태로 복귀하는 정책이 옳은 것인지는 의문이다. 과연 정책당국은 국책은행의 역할을 진지하게 고민하였을까? 민영화를 해 보지 못하고 원 상태로 돌아왔으니 민영화가 산업은행의 정체성 문제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인지를 평가하기도 힘들게 되었다. 이제 분명한 것은 덩치가 더 커질 국책 통합산은이 이전 산업은행의 고민이었던 활동영역에 대해서 더 큰 고민에 빠질 것이라는 점이다.
경위야 어떻든 기왕 국책은행이 된다고 하니 그 역할을 제대로 정립하여야 할 것이다. 경제가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시장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할 수는 없는 만큼 국가의 역할은 엄연히 존재하고, 그 역할은 결코 작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실러(Schiller, Robert)는 최근 저서 「새로운 금융시대」(원제 Finance and the Good Society)에서 금융이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마침 금융위기로 금융기관의 도덕성이 질타를 받는 상황에서 이 책은 금융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불식시키려고 애를 쓴다. 새로이 출범하는 산은의 역할과 방향성을 질문 받았지만, 이미 언급되고 있는 것 외에 새로운 역할을 생각해 내기는 어려웠다. 단지, 외부에 있는 사람으로서 임직원들이 너무 미시적인 전략에 매몰되어 1954년의 초심을 잃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한마다 던지고 싶다. 나는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국민에게 충직한 은행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나칠 경우 비판을 받지만 어떤 종류의 은행이든 주주의 이익에 부합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바람직하다. 이런 점에서는 국책은행도 예외가 아니라고 보기에 산은은 궁극적 주주인 국민에게 충직한 은행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산업은행이 오랜 기간 강점을 가졌던 기업금융의 노하우를 이용하여 기여할 수 있는 분야를 먼저 생각했으면 한다. 그 중 통일 과정 및 그 이후에 대한 기여가 우선 떠오른다. 이미 많이 지적되었고 내부적으로도 통일금융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들었다. 통일이라는 이슈와 관련해서 고민한다면 산업은행이 무언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령, 산은은 2005년 이후 개성공단에 진출한 기업들에게 금융지원을 하였던 사실이 있다. 그 즈음 산은경제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연구소가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북한경제전문가 100인 포럼’을 준비했던 생각도 난다. 당시 북한팀에는 북한관련 연구 결과도 꾸준히 축적되고 있었다. 2008년 이후 남북관계가 급랭되지 않았다면 산업은행이 지속적으로 이 분야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하였을 텐데 아쉬움이 크다. 통일이 된다면 사회간접자본의 건설과 관련된 금융에 노하우가 많은 산은의 역할은 더 커질 것이다.
흔히 상업은행은 경기에 순응하는 대출행위를 한다. 경기가 좋을 때 더 많은 대출을 하고 경기가 나쁠 때 대출을 감소시킨다는 뜻인데, 단기수익을 최대 목표로 한다면 이는 적합한 행위일 수 있지만 경기변동을 증폭시킨다는 거시적 비용이 따른다.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이런 상업은행의 행위를 쫓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할 수만 있다면 금융행위를 통해 경기의 변동폭을 줄이는 것이 진정 국민을 위하는 국책은행의 역할일 것이다. 내부연구를 통해 산은이 이미 그런 역할을 다소나마 하고 있다고 분석되었다는데, 좀 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중소·중견기업을 살리는 데 좀 힘을 써 달라고 권하고 싶다. 정부에서 최근 언급하는 기술금융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은 문제임을 잘 안다. 본질적으로 은행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분야가 바로 담보와 실적이 없는 기업에 대한 지원이다. 그런데 산업은행은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분야에서 독보적으로 업무를 수행한 경험이 있다. 스타트업 기업을 포함한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이 PF와는 다르겠지만, 노하우가 정말 많이 필요한 PF를 선도했던 실력이 산은인에게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들 기업에 대한 지원 역시 산업은행이 주도한다면 잘 수행해낼 능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대학에서 금융기관론을 강의하면서 나는 은행 재직시절의 일화를 많이 들려준다. 산만해지던 학생들이 갑자기 반짝이는 눈초리로 나를 집중할 때면 나도 덩달아 신이 난다. 나는 내가 오랫동안 재직했던 산업은행이 국가를 위해서 큰일을 해 왔다고 설명할 때가 좋다. 아시다시피 청년들의 취업이 무척 어렵다. 혹자는 학생들의 눈높이를 나무라기도 하는데 학생들만을 탓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양질의 일자리가 절대 부족하다. 망할 것 같은 일자리에 청년들을 내 모는 것이 바른 행동은 아닐 것이다. 산업은행은 1954년 설립 이후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각 단계마다 제 역할을 해 왔다. 그리고 그 기여의 궁극적인 과실은 언제나 일자리의 창출이었다. 통합산은 역시 국가경제의 발전에 대한 기여라는 사명을 지닐 것이다. 통일과정과 통일 이후에 대한 기여, 경기변동성 완화에 대한 기여, 중소중견기업의 활성화에 대한 기여 등을 통해 궁극적으로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는 것이 지금 산업은행의 어깨에 놓여 있는 중요한 미션이라고 생각한다.
통합 후에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겠지만 자타공인 훌륭한 인재의 집합체인 통합산은이기에 이들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고 더 높은 목표를 위해 힘차게 나아갈 것이라 믿는다. 통합 산은의 건승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