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학교에 부임했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첫 만남에서 87년도에 대학에 입학했고, 내가 잘 아는 유명작가와 대학 동기라는 사실을 직접 들었을 뿐이다. 그 뒤 모임에 한번도 나온 적이 없어 애초에 추측했던 것보다 성격이 내성적이고, 혼자 무언가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보름 정도 연구실을 떠나 있다 돌아와 밀린 메일과 공문을 살펴보다가 인사이동 란에서 그의 면직 소식을 접했다. 전공이 우리말 연구라 혹시 소설가 등 다른 직업을 찾았나, 아니면 학교를 옮겼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면직 사유는 본인사망이었다. 부음 란을 뒤지니 그의 소식이 있었다. 이미 발인이 끝난 상태라 조문을 할 수도 없었다. 미망인의 전화번호가 있었지만 거기로 연락을 취할 정도의 관계는 아니었다.
그 날 밤은 무심히 포털싸이트를 돌아다니며 그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그래도 같은 학교를 같은 시기에 들어온 인연이 있기에 그의 사소한 행적이나마 찾아보지 않고서는 견디기가 힘들었다. 관련된 기사는 특정 단체에서 국어와 관련된 강연을 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특이하게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 대구경북지역의 교수들이 발표한 시국선언이 눈에 띄었다. 그의 이름이 거기에 있었다. 대학에 온 지 겨우 1년 남짓 된 시점에 이런 일에 신경쓰기가 힘들었을텐데, 그 기사를 통해 몰랐던 그의 면모를 약간 짐작할 수 있었다.
다음날 동기 교수에게 전화를 해서 자세한 내용을 들었다.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그가 폐암으로 투병 중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2년 전부터 그랬는데, 주위에도 알리지 않고 혼자 조용히 견뎌왔다고 한다. 수술도 하지 않고 약물치료만 하면서, 자기에게 맡겨진 업무를 묵묵히 해왔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2015년 하반기, 학교의 어떤 위원회에서 그를 우연히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발언을 하는 그를 지켜보는데 얼굴이 꽤 상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그는 이미 중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늦게서야 사실을 안 동료교수들이 매우 안타까와했다고 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휴직을 하고 수술도 받고 좀 더 적극적으로 치료하지 않았을까? 유족들도 그러기를 권했을텐데 왜 그러지 않았는지, 그의 내면을 모르는 나 역시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아직까지 잘 이어지고 있는 교수 동기회에 발길을 끊은 그가 때로는 야속하기도 하였다. 한달에 한번 만나서 이런저런 말을 나누는 것이 그리 힘들까, 우리를 만나는 것이 그리도 달갑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제 그의 속내를 알아내기는 영영 힘들게 되었고 야속함도 사라지게 되었다. 막상 떠나보내고 나니, 고향인 김천 지역의 방언을 연구했다던 그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생전에 한번이라도 먼저 말을 걸어볼 것을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다른 세상에서는 부디 아프지 말고 편히 쉬세요. 이혁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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