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사학자들에 의하면 금융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역사와 거의 궤를 같이한다. 자급자족 경제가 아닌 한 소득과 소비의 불일치는 일반적이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의 탄생은 필연이었다. 은행이든 제2금융권이든 일평생 금융회사 한 번 방문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금융발전으로 금융거래의 빈도가 높아지면서 금융소비자의 피해 사례도 덩달아 증가하고 있다. 금융감독원 자료에 의하면, 금융소비자가 스스로 경험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금융감독원에 제기한 민원은 2020년에 9만 건을 돌파하였다. 최근 5년의 자료를 보면 2019년의 일시적인 감소를 제외하고는 민원이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미국, 영국, EU 등 선진국에서도 소비자들이 가계수표, 신용카드, 모기지대출, 증권 및 보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피해를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금융소비자 피해는 주로 금융소비자의 낮은 금융이해도, 금융소비자 보호제도의 불충분한 역할 수행 때문에 발생한다. 정보 과잉의 시대에 우리는 스스로 금융이해도가 높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온라인상에 떠도는 수만 가지의 금융정보가 곧 우리의 금융지식인 것처럼 오판하는 것이다. 금융행위의 빈도가 높다고 해서 반드시 금융지식이 풍부한 것도 아니다. 실제로 소비자의 금융이해도를 측정한 연구들을 보면 금융거래를 종종 하면서도 복리 개념을 모르는 소비자가 의외로 많다. 사실 금융은 내용이 어렵고 학습이 녹녹하지 않은 분야여서 낮은 금융이해력을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기는 힘들다. 은행에 재직한 경험이 있고, 대학에서 오랫동안 금융을 교육하고 있는 필자도 은행에 가면 신경이 쓰이는 것이 사실이다. 금융상품이 점점 복잡해져 상품의 구조를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금융상품 거래 후 우발상황의 발생으로 손실을 입을 수도 있어, 금융계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법률에 대해서도 얼마간의 지식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공공성이 강한 금융은 규제가 상대적으로 많이 요구되는 부문이어서 대부분의 나라는 다양한 금융감독 기구를 설치하여 그 역할을 담담하게 하고 있다. 문제는 감독의 강도와 결과가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감독권한의 강화가 실제 감독의 강화로 연결되지 않고 오히려 부패 확률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금융소비자 보호기구도 감독기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기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경우 소비자 피해는 오히려 증가할 수 있다. 물론 문제의 근원에는 금융회사의 탐욕이 자리하고 있지만,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금융회사가 소비자에게 시혜를 베푸는 상황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영업 과정에서 금융회사가 소비자를 기만하기까지 하는 것이 현실인데, 아마 많은 사람들이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시 금융회사가 얼마나 많은 약탈적 대출을 자행하였는지 기억할 것이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 EU 등 선진국은 금융산업의 선진화를 위해서는 금융소비자 보호가 필수임을 더 생생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금융개혁법(Dodd-Frank Wall Street Reform and Consumer Protection Act)에 근거하여 금융소비자보호청(CFPB: Consumer Financial Protection Bureau)의 설립을 논의하고 있었는데, CFPB는 2011년 7월에 독립기구로 설립되어 현재 활동 중이다. 이미 다양한 수준의 금융감독기구와 소비자보호청(OCA: The Office of Consumer Affairs)이 있었지만, 금융소비자를 더 효율적으로 보호하기 위하여 별도의 기구를 출범시킨 것이다.
예전에 보험회사에서 자동차보험을 구입하면서 불충분한 설명으로 피해를 보고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넣었지만 기각된 적이 있다. 먼저 보험회사에 불만을 제기했는데 상품을 판매했던 직원은 필자의 말을 경청하려는 기색이 전혀 없이 선뜻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넣으라고 하였다. 감독당국이 감독대상과 유착하여 감독이 무력화되는 현상이 종종 지적되곤 하는데, 민원이 석연치 않은 사유로 기각되었을 때 이를 실감하였다. 현재 금융감독원 내부 기구인 소비자보호처가 미국처럼 독립된 기구로 분리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치솟는 금융민원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던 상황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비슷하였다. 국내에서는 2010년 금융감독원이 그 해를 ‘금융소비자 보호의 원년’으로 삼겠다고 공언하였다. 2011년 금융위원회는 각종 업권별로 분산되어 있던 소비자보호 관련 법령체계를 정비하여 통합하는 논의를 시작하였고, 2012년 금융소비자보호법을 발의하였다. 이후 업계와 소비자단체 간의 이견 등 다양한 이유로 국회 내 논의가 지지부진하다가 2020년에 비로소 「금융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금소법’)이 제정되어 올해 3월 25일부터 시행되었다.
소비자보호 제도가 소비자피해를 줄이는 데 분명히 도움이 되겠지만 이 제도가 문제 해결의 만능열쇠는 아니다. 법체계가 가진 보편적인 한계 외에, 규제 대상이 광범위할 경우 감독당국의 규제만으로는 효율적인 시장의 작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금소법이 제정·시행된 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소비자들이 여기에 크게 의존하기 힘든 이유이다.
결국은 금융교육이다. 금융 선진국은 장기적으로 가장 중요한 소비자보호 대책은 금융교육을 통해 시민의 금융이해도를 제고하는 것이라는 점을 오래전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대로 교육된 금융소비자는 규제당국의 동반자라는 생각으로 2000년 이후 체계적으로 금융교육 시스템을 정비해 왔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등학교에서 금융은 실용경제라는 일반선택 과목의 일부 단원에서 교육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마저도 실용경제 과목을 편제하지 않는 학교가 많으며, 설혹 편제가 되었다 하더라도 학생들이 잘 선택하지 않는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니 고등학교에서 금융교육을 받은 학생이 드물 수밖에 없다. 실제로 대학에서 금융과목을 수강하기 이전 학생들의 금융지식은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난다. 현재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경제학과, 경영학과, 혹은 독립된 금융학과에서 금융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이들 학과에 적을 두지 않은 학생들은 금융권 취업에 관심이 없는 한 금융과목을 수강하지 않고 대학을 졸업할 가능성이 크다. 금융관련 기관에서 부수적으로 금융교육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그 성과가 미미한 것은 경제교육의 경우와 유사하다. 따라서 정부가 진실로 교육할 의지가 있다면 금융을 반드시 대학 이전의 공교육 과정에 ‘독립된 필수과목’으로 편제하여야 한다. 금융이해도가 전혀 없는 사람을 금융문맹이라고 하는데, 각종 국내외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금융문맹률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문맹률이 매우 낮은 나라에서 금융문맹률이 매우 높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교육당국은 깨달아야 한다.
글을 마무리하려는 즈음 향후 금융교육 상황이 더 악화될 것이라는 풍문이 들려온다. 마음이 답답하다. 누가 이런 움직임의 중심에 있는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문맹은 생활을 불편하게 하지만 금융문맹은 생존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그린스펀(A. Greenspan) 전 연방준비제도 의장의 말을 상기해 보라고 그 누구에게 충고하고 싶다.
<월간 울산교육 202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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