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키우던 고양이를 넘겨받아서 키운지 3달이 되었다. 노르웨이숲(Norwegian forest)이라는 품종으로, 짙은 갈색, 검정색, 흰색이 섞인 털이 온 몸에 길게 나 있는 무게 약 4kg의 귀여운 고양이다. 나루(Narwoo)라는 이름의 이 고양이는 미국에서 태어나 태평양을 건넜고, 짧은 서울 생활 뒤 여기 경산까지 오게 되었다. 고양이는 조용하고 깔끔한 성품이 마음에 드는 동물이다. 요즘은 하루를 나루로 시작하고 나루로 끝낸다. 우리 집의 웃음은 절반 이상이 나루로부터 비롯된다. 조용하지만 우리에게만 보이는 애교스런 몸짓도, 하루의 거의 절반 이상을 마주하는 잠자는 모습도 사랑스럽다. 밥 먹을 때 조용히 우리 곁을 지키다가, '밥 먹어야지'하는 소리에 화답하는 작은 울음소리도 귀엽기 그지 없다. 그러다 보니 자꾸 나루에게 지나치게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10여년을 같이 살다 우리 곁을 먼저 떠나는 상상도 하는데, 나이가 든 탓인지 그런 생각을 하면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지난 2월 이사를 할 때의 일이다. 이삿짐 센터 사람들이 올 것을 대비해 나루를 화장실에 가두어 두었다.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 상황을 말하였기에 아무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도착한 에어컨 수리기사가 이야기를 들을 새도 없이 화장실을 간 것이 화근이었다. 그 사람이 화장실 문을 여는 순간, 나루가 엄청난 속도로 뛰어나와 짐으로 어수선한 집안을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어찌나 빠른지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큰 방으로 몰았는데, 큰 방의 발코니에서 막히자 용수철처럼 뛰어오르기도 하였다. 결국 나에게 잡혔지만 갈곳이 마땅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이사할 곳(지금 집)으로 가서 안방 화장실에 고양이를 넣어 두었다. 이번에는 아예 문밖에 주의 문구를 써붙였다. 비록 사람은 들어가지 않았지만, 하루종일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시끄러운 곳에 있었으니 신경이 많이 쓰였나 보다. 안방 화장실에서 꼼짝않고 하루를 보낸 뒤에도 나루는 화장실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나와 함께 침대에서 하루밤을 잤고, 그 뒤에는 화장실 욕조에 마련된 잠자리에서 잠을 잤다. 그렇게 10일 이상을 지낸 뒤 바깥에 있는 화장실로 옮겨졌다. 물론 그 화장실은 우리가 사용하지 않는다.
그날 이후에 나루는 외부사람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대부분의 고양이가 그런 면이 있다고 하는데, 나루는 좀 심한 느낌이다. 약 이주일 전에 처가쪽 친척들이 놀러왔을 때 나루는 극도로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베란다 문을 열고 사람들이 한번에 몰려드니 '하악' 하는 소리를 내며 위협을 하는 시늉도 잠시, 내가 다가갔을 때 나루는 변기 뒤에 숨어서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는 잠시 뒤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거기를 빠져나와 거의 포복상태로 다른 방으로 들어갔고, 침대 머리 아래 작은 공간으로 숨어들어가 사람들이 돌아갈 때까지 움츠리고 있었다. 이틀 전 저녁에 조카가 집을 방문해서 하룻밤을 자고 갔을 때에도 저녁 내내 좁은 구석에 숨어서 나오지를 않았다.
트라우마(trauma). 사전적 의미는 '재해를 당한 뒤 생기는 심리적 불안감'이니 안 좋았던 경험에 의한 나쁜 기억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다. 나는 이삿날 겪었던 일이 나루의 트라우마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고작 10여년을 살다 갈 나루에게 그런 트라우마를 겪게 한 것이 내 탓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나루에게 미안한 일을 하게 될 때도 죄책감이 생긴다. 특히 나루를 우리와 격리시킬 때마다 미안함을 느낀다. 집사람과 같이 외출을 하거나 밤에 잠을 잘 때면 나루를 화장실에 가둔다. 낌새를 알아차린 나루는 도망다니다가도 쉽게 포기를 하고 내 손에 잡힌다. 그리고는 곧장 눈을 감고 그르렁거리며 나의 손길을 느끼는데, 그런 나루의 조그만 얼굴을 눈높이에서 쳐다보노라면 왠지 미안함이 커진다. 가끔 눈을 떠 나를 쳐다보는 커다란 눈망울도 유난히 슬프다. 계속 만져주고 싶지만 부득이 작별을 하고 나올 때 나루의 얼굴 표정에서 선뜻 눈을 떼기가 힘들다. 갇혀진다는 것이 나루에게 트라우마는 아닐 것이다. 고양이는 원래 좁고 어둑한 장소를 좋아한다니 말이다. 오히려 그 장소가 외부에 느닷없이 공개되었을 때 나루는 심한 두려움을 경험하였고, 그것이 지금까지 트라우마로 남은 것 같다. 반면, 그런 나루를 격리시켜 외롭게 만든다는 생각이 우리를 괴롭히니 우리에게는 나루를 감금시키는 것이 일종의 트라우마인 셈이다.
4월이 되고 기온이 좀 높아지자 우리는 나루를 베란다로 옮겼다. 화장실에 갇힐 때 나루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했는데, 어제 나루를 안아서 잠자리에 누이고 베란다 문을 닫았을 때 우리는 상상만 하던 그 표정을 유리창 너머로 볼 수 있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멀뚱함, 남겨진 데 대한 허탈함 등이 뒤엉킨 듯한 그 표정은 우리가 상상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가 안방 문을 열고 사라질 때까지 나루는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4월이 벌써 중반으로 내달리고 있다. 오늘 수업을 마치고 집사람과 함께 경주로 봄나들이를 갔다.1 차창으로 보이는 풍경은 눈부셨다. 벚꽃, 복사꽃, 배꽃 등 사방이 꽃 천지였다. 해마다 보면서 해마다 같은 감탄을 한다. 유난히 이 지역은 봄꽃이 아름답다. 이제 일 주일 뒤면 세월호 2주기가 된다. 진도 앞바다에는 아직도 9명의 사람이 물 속에 잠겨있는데, 불과 2년 전 찬란한 봄처럼 피어올랐던 학생들이 이제는 우리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영문을 모른 채 떠난 사람은 안타깝기 그지없고, 뒤에 남은 사람은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유족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상황을 지켜본 우리도 그들이 배에 갇힌 채 숨져갈 때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감금한 사람들은 어떤 트라우마에도 시달리지 않는 모습이다.
어제 본 나루의 모습. 남겨진 나루가 유리창을 통해 우리를 보던 그 눈동자에서 나는 세월호에 남겨진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배가 기울고 물이 차서 뒤집혔을 때, 배 안에 갇힌 아이들은 바로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서서히 숨이 막혀 발버둥을 치면서 죽어갔을 아이들. 그 아이들의 영혼이 봄꽃이 되어 우리를 찾아오는 4월, 꽃내음 향그럽고 바람은 부드럽지만 마음은 칼날에 베인 것처럼 아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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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박물관 문화수업을 듣는 집사람이 전날 고전건축에 대한 강의를 듣고 불국사에 가고 싶어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