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떠난 이후에도 잊지 않고 학창시절의 은사를 찾아뵙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각자의 생활이 바쁘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고마웠던 기억 역시 아련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학교에서 그런 고마움을 베푸는 스승이 점점 드물어지고 있는 것도 그 이유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다행히도 나는 인생에서 지금까지 두 분의 고마운 스승을 만났다.
첫번 째는, 나에게 유학의 길을 열어 주신 이준구 선생님이다. 방황 속에 20대를 보내고 얼렁뚱땅 취직해서 직장생활에 찌들어 가기 시작하던 때, 고민 끝에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미 30대 중반으로 들어선 때라 시험공부 등 준비 과정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는데, 무엇보다 미국유학에 필요한 추천서를 받기가 어려웠다. 졸업한 대학의 홈페이지를 방문하니 학창시절 배운 교수님들은 겨우 다섯 분 남짓 학교에 남아 계셨다. 근무 중에 직접 찾아뵙기가 힘들어 염치불구하고 이메일로 세 분의 교수님께 추천서를 부탁드렸다. 바로 다음날 이준구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일 찾아오게" 하는 짧은 답신이었다.
신속한 수락 답신에 너무 놀랐다. 사실 대학 2학년 때 선생님께 미시경제학을 듣기는 했지만 수강생이 많은 데다 그다지 우수한 학생도 아니었기에, 그런 반응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부랴부랴 간단한 이력서와 성적표를 가지고 근무 중에 시간을 내서 찾아뵈었다.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학교 몇몇을 말씀드렸더니 나의 학점, 수강과목 등을 보시고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셨다. 그리고는 추천서를 써 놓을테니 며칠 후에 다시 와서 찾아가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학교 연구실을 찾았을 때, 선생님은 내가 보는 앞에서 직접 작성하신 추천서를 여러 장 출력하시고 싸인을 하셨다. 그리고는 잠시 꽃에 줄 물을 가져온다고 자리를 비우셨다. 봉투에 넣고 봉인을 해 버리면 다시 보기 힘든 추천서 내용에 자연히 신경이 쓰였다. 너무 궁금한 나머지 슬쩍 내용을 본 순간, 뭉클한 느낌이 내 가슴을 적셨다. 처음 찾아뵈었을 때 "자네는 학점 이야기는 하면 안 되겠구만. 요즘 학생들 학점에 비하면 너무 낮아서 말이지"라고 말씀 하셨는데, 막상 추천서에는 "이 학생의 학점이 비록 낮지만 한국 내 다른 대학에서는 전 과목 A를 받을 정도의 실력입니다."라고 되어 있었다. 잠시 후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추천서를 봉투에 넣은 다음 서명하셨고, 나는 몰래 본 내용에 대해 고마움을 표하기도 힘들어 그냥 의례적인 감사 인사를 드리고 연구실을 나왔다.
그 이후 나는 지원한 몇몇 대학 중 하나에서 입학허가를 받고 유학을 떠났다. 미국대학의 유학 허가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영향을 미치기에, 선생님의 추천서가 입학허가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하고 확실한 것은 그 추천서를 통해 나의 자신감이 크게 상승했다는 사실이다. 늦은 유학, 만만치 않은 비용, 주위의 만류 등 그 당시 내가 유학을 가는 데 추동력이 되는 요소는 거의 없었다. 의기소침한 상태에서 슬쩍 훔쳐본 선생님의 추천서. 그것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유학준비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했을 것이고 당연히 입학허가를 받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당시 선생님께서 제자의 상황을 이해하시고 약간의 힘이나마 주시려고 일부러 자리를 비우신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1
학위를 받고 귀국한 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매년 서너 차례 메일로 인사를 드리고, 가끔 서울에 가면 직접 찾아뵙는다.2 금년에 정년퇴직을 하셨지만 선생님은 여전하시다. SNS로 젊은이들과 활발하게 소통하시고, 심지어 팬클럽까지 있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위치에 계시면서도 그런 것과는 거리를 두고 사신다. 오히려 잘못하고 있는 정치권에 심심찮게 쓴소리를 하신다. 학교 다닐 때는 잘 몰랐던 면모인데, 그런 선생님의 삶 자체가 내게는 무엇보다 큰 가르침이 된다. 지난 겨울 선생님을 방문하였을 때, 새로 나온 미시경제학 교과서에 직접 싸인을 해 주셨다. 그리고 떠날 때는 "자네같은 제자들이 있어서 든든해" 하며 내 손을 잡아주셨다.3 기쁘기도 했지만, 내가 선생님 가르침대로 잘 살고 있는지 생각하니 내심 부끄러웠다.
스승의 날이 있는 5월의 첫 날에 선생님께 메일을 보냈다. 이런 저런 안부를 여쭙고 마지막에 감사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쓰는데 코끝이 씨큰해 왔다. 지난 스승의 날 받은 학생들의 선물을 보면서, 비록 부족하지만 선생님처럼 좋은 스승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 내가 추천서를 훔쳐본 사실을 고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 이후 만남에서도 여쭙기가 힘들었다. 다만, 언젠가 선생님께서 '학생들의 추천서에 인색하지 않은 것이 교수로서의 임무라고 생각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그래서 이런 생각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본문으로]
-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에도 선생님을 귀찮게 한 적이 있다. 모 대학에 지원하는데 국내에서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의 추천서를 요구하였다.송구스러움을 무릅쓰고 선생님께 메일을 드렸다. 그런데 이번에도 선생님은 일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추천서 작성을 승락하셨다. [본문으로]
- 선생님은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보수적이 되어가는 한국의 상황을 우려하셨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