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유학을 떠날 때 받은 입학허가서의 마지막에는 대학원 주임교수의 서명이 있었다. 이미 여러 장의 리젝트 편지를 받은 상태에서 별 기대없이 개봉한 편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We are very pleasesd to inform.......". 허가 편지였다! 그 순간 얼마나 가슴이 뛰던지 지금까지도 그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때 그 서명의 주인공이 Michael Alexeev 선생님이었다. 당시에는 그가 나중에 내 논문의 지도교수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늦은 나이에 유학을 가면서도 공부를 끝내고 미국에서 일을 찾으리라는 소망을 버리지 않았지만 미국생활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그들의 엄청난 공부량과 공부를 사랑하는 태도에서도 주눅이 들었지만, 언어 장벽 역시 그리 쉽게 극복되지 않았다. 생각 끝에, 불편함 속에서 생활하는 것은 행복할 것 같지 않아 가능한 한 서둘러 끝내고 귀국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처음엔 화폐금융론(monetary economics)을 전공하려고 했다. 그래서 Qualifying 시험과 Field시험을 모두 통과한 3년차에 E. Leeper교수를 찾아 의향을 말씀드리고 수락을 받았다. 그런데 그 다음이 순조롭지 않았다. 서둘러 논문을 작성하려는 의지와는 달리 나는 너무 기반이 약했고, 수준 낮은 질문을 해대는 그런 나를 그가 감당하기가 버거웠던 것 같다.1 사실 내가 연구하려는 내용이 그의 관심분야가 아닌 것도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한다.2 이메일을 통해 거의 매일 교수를 괴롭히고 있던 어느 날, 연구실로 찾아오라는 그의 메일을 받고 만난 나에게 그는 '다른 지도교수를 찾아보라'는 제안을 하였다. 눈 앞이 노래지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6개월이 경과한 즈음에 지도교수를 바꾼다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유학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큰 일이었다.
급히 대안을 생각했다. 그 때 생각한 사람이 바로 Alexeev교수였다. 러시아 태생3의 경제학자인 그는 외국학생들에게 매우 친절하다는 평판이 있었다. 즉각 그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분야가 이러이러한데 그것이 교수님의 전공분야와 접목될 수 있을 것 같으니 일단 청강을 할 수 없느냐는 내용이었다. 그는 흔쾌히 수락하였고, 덧붙여 내 관심분야에서 읽을 만한 논문도 여러 편 소개하는 친절함을 베풀었다. 그런 고마움에 보답하고자 수업을 열심히 청강하였고, 수업 중에 질문도 많이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런 과정을 거친 다음에 그의 연구실로 찾아가 박사논문의 어드바이저가 되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는, 자기는 금융분야에 아는 것이 없으니 그것은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전제 하에 제의를 수락하였다. 나는 가능하면 일찍 논문을 끝내고 싶다고 말하였고 이에 대한 그의 답은 간단했다. "논문을 일찍 끝내고 말고는 오로지 당신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나는 논문 주제를 찾기위해 무진장 노력하였다. 시간을 6개월 이상 허비하였다는 생각이 나를 초조하게 하였다. 그래서 일주일에 6-7개 이상의 논문 아이디어를 공책에 기록하면서, 과연 박사논문이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였다. 그러던 차에 Shleifer and Vishny의 1994년 논문을 찾았고, 그 논문에 은행을 도입하는 아이디어를 구상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아이디어가 구상되고 난 이후에 이를 정리하여 Alexeev교수를 찾았고, 해 보자는 결정을 받고 난 이후에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아마 내 생애에 이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 만큼 절박했다는 반증이다. 논문을 작성하면서 애매하거나 모르는 부분이 나오면 지체없이 선생님께 메일을 보냈고, 신기하게도 선생님은 새벽에 보낸 메일에도 거의 즉답을 해 주셨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는 1년 만에 세 개의 chapter를 거의 완성할 수 있었다.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제한된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성과였다. 물론 그것 조차 선생님의 적극적인 지도가 없었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은 나에게 1년 정도 더 하면 논문을 더 개선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완곡히 거절하였다. 사실 지도교수의 제의를 그렇게 쉽게 거절하기는 어려운데 그에게는 어떠한 권위적인 기운도 느낄 수 없었기에 그렇게 대응할 수 있었다. 나는 귀국행 비행기 표를 예약해 놓은 상태에서 속도를 올렸다. 그렇게 매달렸는데도 떠나기 바로 전날에 원고를 완성해서 제본을 후배에게 맡긴 상태로 겨우 귀국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학교를 떠나기 얼마 전 선생님께 무언가 감사의 표시를 하고자 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말씀드리니 선생님께서는 학교 안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같이 하자고 말씀하셨다. 13불 정도의 소박한 점심이었다. 선생님과 마지막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때 내가 한 과목도 수강하지 않은 나를 기꺼이 받아 준 이유를 물었다. 선생님은 러시아인으로 미국대학에 입학했을 때 외국인인 자기를 각별하게 보살펴 준 은사4에 대해 말씀하셨다. 자기는 그 선생님의 은혜를 받은 이후에 그대로 학생들에게 실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2011년 여름에 선생님께서 한국을 방문하셨다. 일본에 방문학자로 나와 있는 중에 한국에 있는 제자들의 초청으로 방문해서, 첫날 모 연구원에서 세미나를 하시고, 그 다음날 한국관광을 하고 일본으로 돌아가셨다. 같은 학교에서 유학을 한 선생님의 제자 대여섯 명이 그날 하루 종일 선생님의 가이드가 되었고, 여의도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한 뒤 헤어졌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떠나기 전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손수 미국에서 가져온 머그잔을 선물로 주셨다. 대학 로고가 찍힌 큰 잔이었다.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은데, 선생님은 그렇게 자상한 분이셨다.
시간이 지나고 생각하니, 내가 입학허가서를 받은 그 시점부터 선생님과는 깊은 인연으로 맺어질 운명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건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만약, Leeper와 결별하고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의 늦은 유학생활은 처참한 결과로 끝났을 수도 있다. 이준구 선생님이 나의 유학길을 열어준 스승이라면, Alexxev선생님은 나의 유학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게 이끌어준 스승이다. 이 지면을 빌어 Alexeev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싶다. "Thank you very much for your kindness, professor Alexeev. I love you."
- 당시에는 내가 수준이 낮은지 조차 모를 정도로 내 공부의 기반은 취약했다. 재정적 물가이론을 전공하여 그 분야에서 꽤 유명한 그에게 내 모습은 참으로 우스웠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당시 안식년이 예정되어 있어서 서두르는 나를 감당하기가 더 어렵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본문으로]
- 내가 하려고 한 연구는 통화정책의 단기적인 효과와 관련된 것이었다. [본문으로]
- Alexeev선생님이 미국으로 건너올 당시에는 소련이 건재하고 있을 때였다. 그의 모친인 Alexeeva가 Times 표지를 장식하기도 한 유명한 반체제인사였던 것으로 보아 정치적 망명을 한 것이라 생각된다. [본문으로]
- Duke대학의 경제학과 교수로서 지금은 작고하였다. 당시 선생님으로부터 은사의 성함을 들었고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였는데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홈페이지를 방문하였지만 제대로 찾을 수 없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