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을 직접 만난 적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통해 신영복 선생을 처음 알았다. 87년 6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군인 출신의 대통령이 다스리는 사회는 지금 못지않게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던 20대 후반, 이 책이 전하는 감동은 특별했다. 감옥 밖의 사람보다 더 분노해야 할 사람이 고요한 우물같은 성정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20년을 감옥에서 생활한 사람의 글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그의 글을 곱씹어 읽었다. 그러면서 외람되게도 바깥 세상이 오히려 선생이 20년을 살았던 감옥보다 더한 감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햇빛출판사에서 나온 초판은 이사를 하는 와중에 분실되었다. 안타까워하던 차에 작은 아이가 대학에 입학하면서 돌베개에서 펴낸 신판을 얻게 되었다. 학교는 학부모가 신입생 자녀에게 주는 편지를 작성하게 하였고, 학생에게 권하고 싶은 책을 물었다. 나는 한 장의 편지에 아이에게 당부하는 말을 적으면서『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권하였다. 이렇게 취득한 책을 아이가 읽고 지금은 내가 보관하고 있는 중이다.
지난 1월 15일 우리 결혼기념일에 선생은 세상을 떠났다. 다음날 뉴스에서 고(故) 자가 앞에 붙은 그의 이름을 보고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한참 뒤에야 나는 지난해 말 자신이 암 판정을 받았음을 밝히는 선생의 인터뷰를 떠올렸다. 그래도 노령에 암 판정이라 그리 급하게 별세하시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갑작스럽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마침 서울에 머물던 차라 16일 두시에 시작된 조문행렬에 동참할 수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온수역에 내려 성공회대로 가는 마을버스를 탔다. 무척 가까운 거리에 대학이 나타났는데, 생각보다 훨씬 작았다. 선생은 예전 강의에서 변두리라는 이름으로 이곳을 표현하였다. 위치도 변두리, 논의하고 학습하는 이슈도 변두리라는 뜻이었다.
그날 몇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미디어에 실린 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만큼 학교가 작았다. 다음날 신문에는 각종 추모의 글이 연달아 게재되었다. 그 중에서 내가 몰랐던 사실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한 프레시안의 추모글을 스크랩해서 올린다. 그의 드라마 같은 75년의 인생을 기억하고 싶다. 이제 피곤한 이승의 삶에서 벗어나 편히 잠드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