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축구는 그리 인기가 많지 않다. 야구경기는 거의 매일 중계를 하지만 축구는 국가대표 경기가 아니면 거의 중계를 하지 않는다. 나는 야구보다는 축구가 좋다. 어린 시절 친구와 어울리기에 축구만 한 것이 없었다. 축구는 별 다른 도구가 필요하지 않다. 공 하나면 되고, 친구끼리 경기에서는 굳이 축구화를 신을 필요도 없다. 물론 가죽 축구화나 축구공은 가지고 싶은 물건에 항상 속해 있었지만. 초등학교 때는 축구공이 없으면 못쓰는 테니스공을 차거나, 그 마저도 없으면 운동장에 떨어진 큰 솔방울을 차기도 했다. 그 시기는 전반적으로 궁핍했고 축구는 그런 궁핍의 시기에 어울리는 종목이었다.
2015년 FA컵에서 영남대가 대학팀으로는 유일하게 16강에 올랐지만 성남FC에 패해서 결국 8강행이 무산되었다. 대학팀 사상 최초로 4강 진출의 기록을 세우려다 실패한 작년이 떠올라 더 아쉽다. 2010년 춘계 대학축구 연맹전에서 영남대는 선문대를 꺾고, 창단 이후 최초로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 이전까지 영남대학교 축구부는 변방의 이름없는 축구부에 불과했다. 돈이 없다 보니 선수의 수도 부족해서 자기 팀만으로는 청백전 훈련도 불가능할 정도였고, 자연히 경기 성적도 신통찮은, 그저 명맥만 이어가는 그런 팀이었다.
변방의 이름 없던 영남대가 이렇게 변모하게 된 것은 99% 감독의 힘이었다. 2008년에 김병수 감독이 부임하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 김병수 감독은 청소년 국가대표로 주목받았는데, 혹사에 의한 발목부상으로 일찍 은퇴를 한 '비운의 천재'로 평가되는 사람이다. 은퇴 후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고, 자기만의 축구 철학을 실현시키기 위해 영남대학교에 부임했다고 한다. 김 감독의 부임 이후 영남대학교는 거의 혁신적인 변화를 이루었다. 팀은 각종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 시작했고1, 그러다 보니 고교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영남대학교 축구부에 지원을 하게 되고, 이러한 선수들을 데리고 조련시킨 결과 더 좋은 성적을 거두는 선순환이 구축되었다. 지금은 대학 축구에서 영남대가 최강 수준이라는 데 이의가 없다.
감독이 변하면 선수가 변하고 팀의 성과가 변한다.2 감독의 역할이 이렇듯 중요하기 때문에 감독은 팀의 성적에 대해서도 무한 책임을 진다. 한 예로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에 5대 0의 참패를 당한 뒤 차범근 감독은 현장에서 감독직을 내려놓았다. 이 외에도 팀의 성적에 따라 감독이 영웅이 되기도 하고 공적이 되기도 한 예는 수두룩하다.
긴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학기 중에 미루어 놓은 논문 작성, 2학기 강의준비 등을 위해 책상을 지키면서 여유시간에 채널을 돌리며 축구중계를 찾는다. 대학축구 중계에서부터 K리그, EPL 등 거의 잡식에 가깝게 축구를 시청한다.3 얼마 전에는 박지성이 뛴 레전드 매치(맨유 대 뮌헨)를 보기 위해 SBS Sports 채널을 1달간 한시적으로 구독하기도 했다. 7월 1일에는 대구 스타디움에서 대구FC와 서울E랜드의 경기가 있는데 보러 갈 작정이다. 메시가 더 나이 들기 전에 스페인에 가서 그의 경기를 보는 것이 작은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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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임 후 짧은 기간에 2010년 춘계연맹 우승, 2012년 추계연맹 우승, 2013년 U리그 우승을 달성하였다. 특히 U리그 우승은 지방대 최초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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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축구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운동들, 그리고 대부분의 조직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국가의 경우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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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8월에 입영이 예정되어 있던 1990년 월드컵 당시에는 밤을 꼬박 새우며 거의 전 경기를 시청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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