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대에는 어릴 때 사진이 없거나 귀한 사람들이 종종 있다. 전반적으로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인데 나 역시 돌 사진을 포함하여 어린 시절 사진이 거의 없다. 초등학교 입학 직전인 7살 무렵, 셋방살이 여러 가구가 모여 살던 한옥집 장독대에서 고무신을 신고 쑥쓰러운 듯 웃고 있는 흑백사진이 나의 첫 사진이다. 마치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아프리카의 어린 아이처럼, 그 사진 속의 나는 불쑥 나온 배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먹을거리가 귀하던 시절, 보통 사람의 식탁은 밥이 중심이었다. 요즘 것과는 크기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밥 그릇에, 마치 아이스크림콘처럼 채워진 그 많은 밥을 어떻게 다 먹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집 역시 예외가 아니었는데, 많은 밥에 길들여진 나는 밥상을 차릴 적마다 '밥 많이'를 되뇌었고, 결국 '밥마니'라는 우스꽝스러운 별명을 얻게 되었다. 좀 더 크고 난 뒤에도 나는 이 별명으로 인해 자주 식구들의 모임에서 웃음거리가 되곤 했다.
밥을 사전에서 찾아 보면 몇 가지 뜻이 있다. 우선, '쌀이나 보리 따위의 곡식을 씻어 솥 따위에 안친 후, 물을 붓고 낟알이 풀어지지 않을 만큼 끓여서 익힌 음식'이라는 뜻이 있다. 우리 식탁에 놓이는 밥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 다음에 '끼니로 먹는 음식물'의 뜻이 있는데 어떤 형태이든 음식물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밥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동물이 살아가기 위하여 먹어야 할 거리, 또는 기르는 가축에게 주는 먹이'라는 뜻도 있다. '짐승들의 밥이 된다'라는 표현에서의 밥이 그것이다. 그리고 '한 개인이 차지하는 일정한 몫의 양이나 물건'을 밥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남에게 이용 당하거나 희생되는 대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서의 밥이 있다. '술취한 사람은 소매치기의 밥이다' 라고 할 때의 밥이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밥을 그렇게 사전적인 의미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밥은 모르는 사람을 서로 친숙하게 하고 아는 사람은 더 가깝게 만드는 신통한 힘이 있다. 누군가를 새로 알고 싶을 때 '밥 한번 먹자'고 하며, 더 친한 사이가 되려면 자주 함께 밥을 먹어야 한다. 기쁨과 슬픔, 외로움, 화남 등 모든 감정의 표출 현장에 밥이 존재한다. 축하할 만한 일이 생기면 '밥 한번 사'라고 말하고, 빈소에서도 밥상을 사이에 두고 슬픔을 나눈다. 혼자 먹는 밥은 왠지 어색하여 대체로 밥을 혼자 먹는 경우는 드물다. 친구끼리든, 연인 간이든, 식구끼리든, 우리는 대부분 모여서 밥을 먹는다. 화가 날 때 밥을 먹으며 푸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최근 모 도지사가 밥을 가지고 논란의 중심에 섰다. 보편적 무상급식을 폐지하고 선별적 무상급식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절약되는 부분을 가난한 학생의 공부 지원에 쓰겠다고 한다. 학교는 밥 먹는 곳이 아니라 공부하는 곳이며, 가난한 학생들이 공부를 통해 신분상승을 하도록 학교가 도와야 한다는 것이 그 취지다. 왠지 어감이 비장하여 그냥 듣다 보면 내심 감동을 하는 사람도 생길 것 같다. 노회한 정치인인 그의 언행이 자신의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의 밥에 대한 인식은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1
그는 자신을 검사로 출세시켜 준 사법시험과 같은 '시험용 공부'만을 학교에서 해야 할 '공부'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니 그에게 밥이란 오로지 사전적인 의미의 밥이며 급식은 마치 자동차의 급유 정도로만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학교에서 밥을 먹는 행위는 공부할 힘을 얻기 위해 입을 거쳐 배 속으로 밥을 옮기는 무미건조한 작업이 결코 아니다.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공부하던 기억은 가물해도 친구와 함께 밥을 먹던 기억은 오히려 생생하지 않은가. 수 많은 밥에 대한 기억이 있겠지만 자율학습이 시작되기 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깨알같이 수다를 떨며 밥을 먹던 광경을 떠올려 보라. 숟가락을 들고 돌아다니며 이 친구 저 친구의 반찬을 뺏아 먹던 아련한 추억도 꼬리를 물고 떠오를 것이다. 점심을 먹고 돌아서자 마자 빵이나 국수를 사 먹기 위해 매점으로 돌진하던 기억도 새록새록 솟아오르리라. 이렇게 밥은 기실 학교생활에서 '공부'와 그 중심을 다투었다. 이는 단지 양적인 문제가 아니다. 세상살이를 알아 나가는 모든 과정이 공부라면, 앞에서 언급한 많은 사회적 의미를 지닌 밥을 먹는 행위를 어찌 공부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많은 삶의 현장에서 그렇듯이 학교에서도 밥과 공부는 분리할 수 없는 일체이다. 밥과 공부를 분리하는 순간 밥은 주다가도 쉽게 뺏을 수 있는 하찮은 보조물로 전락하고 만다. 단언컨대, 밥은 그렇게 가볍지 않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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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급식을 선별적으로 할지 보편적으로 할지에 대한 논란도 결국 밥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교과서 등 소위 '공부'관련 준비물을 모두에게 무상으로 지원하는 데 대해서는 아무런 이견이 없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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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과연 편협하게 정의된 공부를 통해 신분상승을 하는 것이 지금 가능키나 한지 그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현실은 이미, 모든 것을 희생하고 '공부'만 시켰는데 그 학생들의 '밥' 문제 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그런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니 남의 도움으로 끼니를 겨우 해결한 학생이 학교에서 공부 보조를 받더라도, 작금의 교육현실에서 그 공부의 도움으로 신분을 바꾸기란 더더욱 불가능하다. 그가 이를 모를 리 없는데 이 사실을 논거로 삼은 것은 비겁해 보인다. [본문으로]